작은아이가 어린이날 선물로 집안에서 키울 수 있는 무언가를 요구했다. 집안에서 키울거라...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온 후에 다섯마리 가량의 강아지를 키웠었는데 모두들 우리들의 뜻과는 상관없는 길로 가버려서 우리집에서는 강아지가 맞지 않는가보다는 결론을 봤었기에 '우선제외대상'이 강아지였다. 사슴벌레, 청거북, 햄스터, 잉꼬, 열대어, 이구아나, 기니피그 같은 것들이 입에 오르내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해서 결국 토끼로 합의를 보았다. 한마리는 외로울 것 같아서 두마리를 작은 토끼장과 함께 사 온지가 스무날이 되었다. 이름은 '깡이'와 '총이'다. 강아지는 임시로 집안에 들어온 건데 알래스칸 말라뮤트라고 이름도 생소한 이 개는(쉽게 말해 썰매견) 남편이 밖에서 키울 개를 구한게 아직 너무 어려서 밖에서도 혼자 꿋꿋이 견딜 만 할때까지만 안에서 키울걸로 집에 온 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강아지 이름은 '종달이'다. 토끼나 강아지나 태어난 지 두달도 안되는 것들이라 생김새부터가 무척 귀엽고 이 어린 것들이 어미랑 떨어져 낯선곳에서 적응하는 게 안스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지난 판화전 이후 작업을 꾸준히 하리라는 각오를 했었는데 날이 따뜻해지니 작업실 마당에서 풀 뽑고 씨 뿌리고 묘종 심고 물 주고 선흘이 집 바꿔주고 마당 정리하고... 밖의 일 하느라 작업을 한 지가 꽤 오래인듯 싶다. 게다가 집에는 토끼와 강아지가 함께 있어서 그녀석들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들과 실갱이를 하고 보살피고 놀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는데 그림그리는데 마음 내기가 쉽지 않다.
친구가 올 봄에 작업실을 지어서 이사갔는데 웬만해선 작업을 놓지 않던 그 친구도 근자에는 작업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리하느라 시간도 갔겠지만 작업실 앞 정원 만들고, 울타리 치고, 의자 만들고, 쪼가리 나무들 이용해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고등학교 은사님이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은사님은 한창 왕성하게 활동을 할 시기에 작품활동을 접고 시골에서 손수 집 짓고 정원가꾸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계시다. 그 친구의 얘기는 집짓고 이것저것 만들다보면 그 재미에 빠져 그림그리는 게 시시해 질 것도 같다는 거였다
스승의 날에 환갑이 넘는 나이를 오직 그림이라는 화두를 안고 작품활동을 해 오신 또 다른 은사님을 찾아뵜더니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재미도 없는 걸 어찌 그리들 붙잡고 있누?"였다. 암 투병 하느라 편찮으신 몸으로 삶을 찬찬히 돌아보며 나왔을 법도 한 그 한마디에 뼈가 있어 보였지만 정작 핵심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재미없으니 진정으로 그만 두고 더욱 가치있는 일을 찾으라는 건지, 재미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붙잡고 버티라는 건지... . 나름대로는 작품하는 것 자체를 즐기며 재미있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쉽게 확대해석해 받아들여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올 봄에 씨 뿌리고 풀 뽑고 묘종심고 그 과정들을 지켜보며 그 재미를 느끼기 전 까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없는 것인 줄 몰랐다. 그런데 보란듯이 내 눈앞에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생명들을 보노라면 그림 그리는 게 시시하기만 하다. 그리는 게 재미없고 시시한 게 아니라 소위 작품이라는걸 만드는게 그렇다는 걸거다. 아마도 근자에 노동집약적 회화가 살아나는 이유도 온갖 매체의 범람 속에서 인간의 손으로만 할 수 있는 가치들을 되새기는 뜻도 있지만 손놀림 하나 하나의 과정들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데서 오는 재미도 한 몫하는 게 아닐까.
앞서 작품활동을 중단했다던 은사님이 이십여년 만에 비로소 그림을 다시 그리신다고 하셨다. 그 재미있는 집짓기와 정원가꾸는 일에서 배울 것 다 배우고 얻을 것 다 얻으셨기 때문일까. 그 선생님의 그림은 어떠할까 미리 궁금해 진다.
(200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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