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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세라 '기울어진 호' / 뉴욕 맨하튼 패더럴 광장 조형물
최혜원 <미술 쟁점> 중에서
■ 공공의 美인가, 공공의 敵인가
세계 최고의 미술시장이자 현대미술의 메카인 미국 뉴욕의 맨하튼 한복판에서 한 조각 작품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공공미술 정책과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는 미국에서도 한 에술품을 두고 '아마벨'과 같은 철거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조각가인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미국 연방조달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높이 3.6미터, 길이 36미터, 무게 73톤의 거대한 강철조각판인 '기울어진 호(Tilted Arc)'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1981년에 뉴욕 맨하튼의 패더럴 광장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세워졌다. 연방정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용의 0.5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예술작품 설치에 지출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연방조달청은 이 규정에 따라 리처드 세라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설치되자마자 자유로운 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국민의 세금 17만 5천달러로 제작된 작품을 철거하라는 캠페인이 벌어졌고, 마침내 1985년 청문회가 열렸다. 작품의 제작자인 리처드 세라는 물론, 예술가, 예술비평가, 예술사가, 미술관 디렉터들, 정치인과 연방정부 건물에서 근무하는 사무원들까지 대거 참석한 청문회였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세라의 '기울어진 호'가 연방정부의 권위적인 성격을 제거함과 동시에 특수한 장소의 특별한 조건들에 부합되게 창작되고 감상되는 작품이므로 장소를 옮기는 일은 작품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철거에 반대했다. 현재는 칭송해 마지않는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도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듯이 도전적인 예술작품의 새로운 예술언어가 대중에게 널리 이해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하지만 연방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이 자신들의 유일한 휴식처를 빼앗아갔다고 항의했으며, 작품을 의뢰한 연방정부조차 이 작품이 보행을 불편하게 하고 감시카메라의 작동을 가로막아 마약상들에게 좋은 거래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폭탄 테러에도 취약함을 보일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철거를 주장했다. 배심원들은 4대1로 철거를 결정하였고 결국 1989년 3월에 '기울어진 호'는 철거되었다.
세라는 '기울어진 호'를 광장을 가로지르게 설치함으로써 광장을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구분하여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간 경험을 가능케 하고자 했다. 또한 작품과 광장의 연계성을 높여 대중과 소통할 수 있게 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라의 의도는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했다. 세라의 바람은 그 작품이 공공예술이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가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 공공미술의 가치와 역할
공공미술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좀더 시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혹은 삶의 공간을 예술적으로 꾸민다는 취지하에 때로는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한 작품을 세운다든가, 공공미술작품을 구입하는 데 터무니없이 많은 비용을 사용했다는가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문화와 환경 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지역주민을 위해 공공미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길거리를 지나다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박스 하나에 수천만 원에 이르는 세금이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예산 낭비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시민에게 양질의 공공미술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예산 투자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공공미술은 시민과 1백 퍼센트 소통할 때에만 의미가 있고 공공성과 안전성을 보장해야 한다. 공공미술을 설치할 때마다 예술가와 공무원들의 마찰과 공공성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작가들은 시민의 삶 속으로 들어간 예술을 꿈꾸며 공공미술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때로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예술의 공공성 문제는 개인의 사사로운 창작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공 서비스로서의 예술 생산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제대로 된 공공미술의 가치와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미술로 인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들의 영감과 직관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이거나, 혹은 처음부터 대중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공공미술이 대중의 취향에 따라 제작되어야 하는지, 대중의 취향에 안 맞더라도 혁신적인 도전과 같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등의,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모든 예술은 반드시 쉽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일까?
■장소 특정적 미술(Site Specific Art)이란?
리처드 세라가 '기울어진 호' 철거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바로 '장소 특정적 미술'이다. 장소 특정적 미술이란 특정장소, 특정공간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미술을 말한다.
미술관 공간 전체를 작품화하는 설치미술, 자연환경 자체에 작품을 설치하는 대지미술, 일반대중에게 공개된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공공미술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학적으로 보다 넓게 보면 지정된 장소의 주변상태나 특징 등에 맞게 제작된 설치미술이나 장소 그 자체를 위한 환경디자인 등을 포함하는 '장소에 결합하는 예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장르를 포함한다.
세라는 청문회에서 '자신은 들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작품은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긴다든지 해당 장소를 조정할 수 있는 작품은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이 작품은 그 장소의 한 부분으로 세워지는 것이며, 그 장소의 전체조직을 개념적·지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기에 작품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건 작품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림이 캔버스와 한 몸인 것처럼, '기울어진 호' 역시 광장과 한 몸이며 광장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공간과 장소에 대한 경험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래서 장소 특정적인 미술 작품으로 인해 기존에 익히 잘 알고 있는 공간이 변형될 때, 우리는 공간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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