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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용(동덕여대 교수)
제 1세대(19세기말~20세기초) : 작가-신화
현대미술에서 진정한 승부처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다. 신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 역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 성향이나 특질이다. 이 역사의 초입부에서 기념비적인 예는 단연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다. 히스테리, 잘린 귀, 불행한 사랑, 상업적 실패 등등. 알다시피 반 고흐는 승자도, 모더니티의 상징도 아니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살았던 고통스러운 삶이 그의 작품들의 미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관장이었던 네일 맥그레고르는 한 강연에서 반 고흐에 대한 현대적 반응에 내재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이 긴 인용문은 일본의 한 비평가가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평한 내용에 관한 것이다.
"우리시대 걸작중에 걸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데 바로 반 고흐의 <해바라기>다. 알다시피 해바라기는 기쁨과 환희의 표현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친구인 고갱이 프로방스에 도착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친구에 대한 반 고흐 자신의 벅찬 감격이 표현되어 있다. ( ....... ) 1912년,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었을 때, 일본의 한 비평가가 쓴 글은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것은 그의 혈관 속에 흐르는 혈액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혈액의 출렁거림이다."
즉, 화가의 혈액이 캔버스 위에서 회화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때 그의 회화는 그가 속죄적 차원에서 겪은 고통의 지표가 될 뿐 아니라, 고통의 종교 자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일이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어진 작품의 의미가 이처럼 왜곡되는 것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왜 격한지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때 작품의 가치는 명백하게 미학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고통으로 인해 분명한 것이 되며, 예술가를 통해 우리도 그 가담자가 되는 하나의 종교인 것이다."
위에 인용된 일본 비평가의 텍스트는 '예술가-신'의 종교, 즉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닌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고통스러운 예술가의 이미지가 시장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맥그레고르를 따르면, 반고흐에 딱지처럼 붙은 순교자적 이미지는 그의 작품들에 매겨지는 천문학적인 가격과 무관하지 않다. 즉, 고난에 찬 작가의 이미지가 시장을 가열하는 불소시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제 2세대(1930~50년대) : 작가 - 거장
피카소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비롯해 사소한 습관조차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요인으로 작용할 만큼 명성을 날렸다. 반면 작가의 신화화라는 점에선 반 고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피카소가 대단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였고, 반 고흐가 생의 비애를 곱씹었을 기간을 아리따운 모델과 지중해의 해변에서 보냈을 지라도, 둘의 인생사(史)는 동일하게 시장적 호재로 작용했다. ( ....... )
피카소가 통상의 흉허물을 가진 보통 시민 이상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영웅신화에 방해가 될 만한 기억들은 누락되거나 미화되고 정당화되었다. 20세기 미술사의 적지 않은 페이지에서 이 같은 '존재의 세부 생략, 또는 미화하기'를 목격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화되고 브랜드화된 피카소의 이미지도 그의 시민적 속성으로 인한 범속한 면모들이 축소되거나 누락된 과정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분명한 것은 피카소의 명성이,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전략적인 마케팅을 거치면서 난공불락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1921년이 되자 로젠버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피카소 키우기' 캠패인을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고, 그 첫 번째 단계로 피카소를 큐비즘과 신고전주의 양쪽을 모두 섭렵한 위대한 작가로 인식시키기 위한 개인전을 열었다." -마이클 C, 피츠제랄드 <피카소 만들기> 중
( ....... ) 거장의 작품들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거장에게 증여된 아우라에 기대어 특별한 것으로 취급된다. 주어진 작품 자체 내에 그 같은 평가에 부응하는 고유한 내용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거장의 신화는 허구성이 짙게 드리워진 영역이다. 명성은 실체의 기반을 넘어 소비와 소유의 의미를 과장하는 데 우선적으로 요긴한 발명픔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오늘날 거장의 신화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미술시장은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드를 유지시키는 것과 (거의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거장의 신화가 생성되고 구축되는 기간은 현격하게 축소되고 있다. 피카소와 그 당대만 해도 신화 생성에 불리한 실체들을 처리하는 데 한 세대가 걸리곤 했다. 하지만, 일단 구축되고 나면, 그 명성은 미술품의 가치를 담보하는 독자적이고 거의 독점적인 준거가 된다.
제 3세대 (1960~80년대) : 작가 - 스타 또는 수퍼스타
워홀이라는 상징적 분기점을 통과한 이후, 작가의 길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화가와 조각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대중과 부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위 '취향 비즈니스'의 비밀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되었던 것이다. 작가신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앤디 워홀은 마티스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 마티스가 되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역사의 첫 번째 화가였다. 화상이 그렇게 만들어 주기를 기다릴 필요없이 말이다.
워홀에게 필요했던 것은 마티스의 예술성이 아니라 명성이었다. 그리고 마티스가 되기 위해서는 마티스 같은 화가가 될 필요는 없으며, 스스로를 마티스와 같은 작가로 만드는 기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가가 작품의 창작과정에만 몰입하는 영혼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자면, 워홀은 작가라기보다는 기획자에 가깝다. 창작이후, 그러니까 전시되고, 감상되고, 매매되는 단계까지 총괄해 관리하는 것이 기획자의 업무영역이기 때문이다. ( ........ )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교환되는 것은 워홀의 작품들이 아니라 워홀 자신의 이미지다. 그것의 미학적 전략이야말로 -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 진정한 '부재의 전략'이다. 오로지 워홀이란 이름 이외의 모든 것을 삭제하는 전략! 그의 작품들에 주목해, 그 내부로부터 표출되는 미적인 것의 이해를 심화시켜보려는 시도는 거듭 난관에 봉착할 뿐이다. 워홀, 그 이외의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모두 껍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선은 펑키스타일의 은발가면을 뒤집어쓴 그의 자화상으로 되돌아간다.
제 4세대 (1990년대 이후) : 작가 - 블루칩
'비즈니스 예술이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라는 워홀의 예언은 태평양 건너편의 제자에 의해 성취되었다.무라카미는 예술이 비즈니스화하는 단계를 넘어, 비즈니스가 곧 예술인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 ....... )
무라카미의 시대는 시장미술의 완성단계다. 미술은 시장에 완전히 밀착하고, 창작정신은 비즈니스 마인드와 긴밀한 자매결연을 맺는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호화로운 오락의 탁월한 현현'이다. 그가 말하는 예술정신은 하나의 이념이나 표준에 매이는 대신 유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며, 상황이야말로 고려해야 할 유일한 궁극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무라카미가 성취한 시장미술의 진화 의미는 그러므로 분명하다. 그것은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미술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곧 시장이 되는' 미술이다. 즉, 그가 시장과 노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그와 놀도록 하는 것이다. 워홀이 시장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에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이었다면, 무라카미는 시장 자체를 구축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4세대 아트스타와 시장미술의 진일보한 얼개다. ( ....... )
데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 다카시 무라카미로 대표되는 제4세대 아트스타들은 거의 전적으로 시장의 기획상품과 등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소위 탁월한 '작가 마케팅'의 성공사례로서, 그들의 재능과 그들이 거둔 기념비적인 성공 사이에는 미적 기준이라는 모호한 가치를 훨신 능가하는, 매우 명확하지만 서로 얽혀 복잡하게 작용하는 모듈이 존재한다. ( ...... )
이 신세계에서 다음 단계의 스타들이, 그리고 그들을 주축으로 할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들은 이제 시장을 생성하고, 변호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이색적인 예술의 전위부대로 나서고자 할 것이다. 이들은 성공한 예술들로만 구성된 커리큘럼을 통해 배우고, 줄곧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그만큼 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미래의 예술 스타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 생태계의 실정이다.
아트스타라는, 이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흥분제는 우리가 추구하고 집착해야 할 성취의 이름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염원해야 하는 예술적 황폐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월간미술(2009. 3) '현대미술의 아트스타 만들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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