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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입력 2006.05.16 00:06
[한겨레] 공공미술은 문화도시의 꿈을 현실에 풀어놓는 유력한 해결사로 꼽힌다. 하지만 어림짐작이나 내키는 느낌에 끌려 아무 장소에나 설치한다고 마냥 빛이 나는 건 아니다. 특정한 장소에 깃든 역사와 시간의 켜를 싸안고, 주민들 삶 속에 깃든 속내와 어우러져야 눈맛이 나고 향기가 난다. 공간의 성격에 대한 집요한 분석과 주민들과의 소통 노력은 사랑받는 공공미술의 필수적 요건이다. 국내 공공미술·건축 전문가 5명이 '이게 딱!'이라며 골라준 본보기격의 공공미술 작품들을 소개한다.
1. 덕수궁 돌담길과 보도 타일그림
도심 한복판 '흐르는' 유람길
생명은 강으로 흐르고 문화는 길로 흐른다. 그 문화는 생명과 함께 살면서 유한 생명의 초극을 꿈꾼다. 삭막하고 황폐한 서울. 그 한복판의 덕수궁 돌담길은 강과 문화를 새삼 얘기할 수 있는 예외의 공간이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저 혼자 잘나 악다구니하는 빌딩 앞 미술장식과 다르다. 삶과 흥겹게 동반하고 나그네의 눈과 몸, 마음을 담고 싱그럽게 키워낸다.
차도를 인도로 제어한 길은 '직선'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유선으로 오간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인 볼라드는 딱정벌레를 닮았다. 여기저기 배치된 나무의자는 한가하자고 몸짓한다. 차란 물건은 생명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필 수밖에 없다. 직선의 제 것이 아니기에.
또한 여기 길은 통과와 이동의 '지시'가 몸으로 거부되는 공간이다. 생태로서의 나무와 풀숲이 있고 역사의 편린들이 남겨져 있어 웬만한 무신경 아니면 유람을 안 할 수 없다. 이 길에선 바쁜 서울의 길을 끊어버리고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방랑하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가 될 수 있다.
그런 길바닥에 덕수궁 주변의 역사와 자연의 단편들을 새긴 바닥 타일들이 징검다리를 만든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심심할까 염려하는 마음씨와 꾸밈새로 만든 어여쁜 무명씨의 작업이다.
요즘 저작권의 이름을 더 중시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이름 먼저 따졌나. 삶을 위한 예쁜 마음씨와 솜씨가 우선이다. 지친 세상을 동반하고 삶의 지혜를 찾는 도반이 되고자 하는 어여쁜 마음씨와 솜씨, 그것은 도시를 살 만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공공미술의 출발점이다.
박삼철/아트컨설팅서울 소장
2. 장흥 천관산 문학공원
너도나도 한개씩 '돌탑 군락'
한반도 정남진인 전남 장흥에 가면 색다른 느낌의 돌탑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장흥군 대덕읍 천관산 기슭에 자리잡은 문학공원이다. 이청준, 한승원씨 등 유명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라 입지적 요건과도 잘 들어맞는 격이다. 문학 공원에 걸맞는 모양새를 갖추려고 문인들의 에피소드, 짤막한 단편들을 모아 새긴 바위들과 사람들 노력으로 쌓은 돌탑들이 어우러졌다. 그것들은 그곳을 감싼 천관산의 돌탑 모양 봉우리들과 자태가 닮았다.
그래서일까, 신이 만든 돌탑과 인간의 돌탑들은 뽐내기 시합하듯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 고장 전임 읍장과 지역민들의 열성으로 탄생한 돌탑 공원은 여느 공간과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유명 작가 작품도 없고, 한 개인의 열정과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탄생한 것도 아니다. 단지 주민들이 아무 때나 마음먹고 만들기 시작해 최소 삼일에서 몇 주간까지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면서 흔적 남기기를 한 과정이다. 그러다보니 이젠 지역민들 모두의 손 때 묻은 공원으로 변해가고 있다.
길 지나다 주운 돌로 단순하게 쌓은 돌탑들은 정교한 조형물로 진화해 가는 중이다. 원래 돌탑이란 것이 무언(無言)의 기원을 담아 쌓은 상징물이었다면, 이곳 돌탑들은 간절한 기원을 넘어 절대 감성을 일깨우는 작업으로 변해간다. 널린 돌멩이들을 모아 쌓는 작은 손길들로 시작된 돌탑은 각기 다른 700여개 돌탑의 거대 군락으로 자리잡았다. 감상의 고갱이는 눈에 보이는 탑들 하나하나의 위용보다 그것을 쌓았던 사람들의 지난하고도 즐거운 행위들이 유희같이 떠올리게 하는 상념이다. 사람과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상호소통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었던 행위는 돌탑에 쌓여진 의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외지 사람들에게도 열려 누구든 같이 쌓고, 그 돌탑에 자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이 곳은 앞으로 문학 공원의 틀을 넘어 삶의 공원으로 더욱 진화할 것임에 분명하다. 신이 만든 돌탑들보다 더욱 진한 향기를 뿜어내면서….
김영현 유알아트 대표
3. 신세계백화점 리모델링 가림막 디자인
공사장에 '둥실' 떠오른 꿈
검은 모자와 외투 차림의 사람이 점점이 허공에 떠 있다. 서울 충무로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이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본점 윗부분에 설치한 커다란 가림막 그림이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 겨울비 > 라는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 그랬다,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라고. 그렇다. 지금 우리의 도시는 온갖 공사로 해가 뜨고 날이 저문다. 이제 공사는 대한민국의 자연스런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상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우슈비츠에도 있었다는 일상이 이곳에서는 마치 아우슈비츠처럼 있다.
일상을 가릴 수는 없지만 언제나 공사 중인 우리의 일상은 좀 가려져도 좋지 않을까. 그것도 가급적 예술적으로 가릴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사실 공사와 예술의 공통점은 모두 비일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 두 비일상이 만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준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할 것인가. 그러면 그것들은 꿈을 잃어버린 사막, 도시에서 신기루처럼 둥실 떠오를 테지.
1936년 어느 날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경성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한 사내가 불현듯 겨드랑이에 가려움을 느끼며 "다시 한번 날자"라고 외친다. 이상의 소설 < 날개 > 에 나오는 장면이다. 거기가 바로 지금 변신 중인 신세계백화점의 전신, 분신인 것일까. 70년이 지난 지금 저기 허공에 떠있는 환영들은.
최범/디자인평론가·공공미술추진위원회 사무국장
4. 서울역 광장 설치물 그리고 '노숙자 수첩'
소수자 배려한 넉넉한 마음
황사에 신음하느라 봄의 여유를 만끽할 순 없지만, 어느새 민소매가 낯설지 않을 만큼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 계절을 피부로 가장 반기는 사람들은 집이 없거나 갈 수 없는, 아픔을 지닌 노숙인들일 것이다.
노숙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단연 서울역이다. 역 광장에 가면 볼 수 있는 박기원씨의 작품 < 자-넓이 > 는 5미터 크기의 푸른색과 검정색의 기학학적 직각자가 묘한 긴장감을 주지만 왠지 허술해 보인다. 더구나 눕혀진 직각자는 앉거나 눕기에 편하도록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노숙인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역 관계자들에게는 눈살 찌푸려질 일이다. 대합실 의자 사이에 칸막이를 놓아 이용객들이(속내는 노숙인들이) 눕지 못하도록 했듯이, 이 조형물도 구상단계에서 노숙인들이 앉기에 불편하도록 표면을 거칠게 하거나, 중간 중간을 떨어뜨려 아예 눕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팬스를 쳐서 접근조차 불가능하게 해달라는 관계자의 요구가 있었다. 그때 던진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럼 어때요. 노숙인들도 사람인데…. 제 작품에 누워서 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배영환씨의 < 거리에서 > 는 더 걸작이다. < 노숙자 수첩 > 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작고 빨간 수첩이다. 예쁘거나 앙증맞다기 보단 어쩐지 촌스럽다. 무료 배급소나 보건소 위치 등 노숙인 생계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담은 < 거리에서 > 는 3만부 정도 제작되어 노숙인들에게 배포되었다. 작품이라 부르기엔 주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자 사각지대 소수자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작은 목소리라 할 수 있다. < 자-넓이 > 와 < 거리에서 > 는 노숙인를 포함한 소수자를 바라보는, 같지만 또 다른 시선, 작지만 분명 따뜻한 시선의 산물이다.
윤태건/THE TON 대표
5. 포스코센터 앞 '아마벨'
고철더미로 빚어낸 '도시의 꽃'
9m 높이의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고철더미. 설치됐던 1997년 당시, 단위 작품 중 최고 매입가인 16억원을 외국작가에게 쏟아 부은 철강회사 포스코의 저의가 의심을 받았던 환경조형물이다. 한때 그런 논란에 휘말려 "흉측한 오브제"를 철거해야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떠올라 작품의 운명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 수난시대를 무사히 넘기며 지금껏 원래 설치한 장소에 잘 보존되어 있다. 변한게 있다면 그 주변에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작품을 가리게 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만든 프랭크 스텔라는 1960년대 미국미술과 세계미술의 중요한 미술사조인 미니멀 아트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 기하도형이 파편처럼 모이는 복잡한 구성과 색채의 회복을 주장하며 평면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입체, 벽면 설치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의 미술의 성향은 현대건축의 문맥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데, 기존의 형식들을 해체하고 의외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는 사고인 해체주의적이다.
포스코센터 앞에 있는 이 작품 < 아마벨 > (원래 이름은 < 꽃이 피는 구조물 > )은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쓰레기들을 미술작품화 한 정크아트와 달리 스테인리스 스틸을 주조해 수백 개의 조각으로 거대한 형태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형태적으로 포스코 센터 내부 2층 로비 벽면에 걸려있는 초대형 평면작품 < 말보티킨 둘다 > (11m×, 전설 속의 철의 섬)와도 연결된다. 기업미술이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공간에서 의미를 새길 수 있는 귀한 조형물임에 분명하다.
전진삼/건축비평가· < aq >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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