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 (전시기획, 미술사 박사)

자연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곳에 사는 작가는 당연히 자연을 그리게 된다.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 그 자연의 일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진행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교육을 받고 전시를 하지만 김연숙은 제주에서 생활하며 작업한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에는 제주에서의 삶과 제주의 풍경이 전부처럼 자주 등장한다. 2005년 <고요히 머물다>시리즈부터 오름의 능선들, 익명의 무덤 등 삶과 죽음의 가운데 있는 자연을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긴 쓰린 아픔과 기억을 그린다. 과거에는 주로 판화에 몰두했었으나 최근에는 회화로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거문오름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얻은 감성을 정직하면서도 단순한 붓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거문오름 가는 길> 시리즈는 제주의 풍경을 담은 작업 중에서도 풍경을 통해 작가의 주체를 가장 잘 드러낸다. 모네부터 폴록까지 로스코부터 프랑켄탈러까지 추상을 지향했던 많은 작가들에게 자연을 걸러내고 여과한 후 얻은 단순한 형태의 세계 즉 추상의 세계는 모두 작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화상과 같은 것이었다. 작가의 존재가 그림을 그리는 중심이며 그 그림 속에 반영된 것이다. 김연숙도 우직한 수직과 수평의 붓질로 삼나무 무리가 좌우로 늘어선 길과 저 멀리 있는 오름을 자화상처럼 그려낸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가가 굳게 믿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번잡한 것을 모두 추출해 낸 결과 얻은 견고한 것, 변하지 않는 것,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모두 작가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다.